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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하기와 살해당하기
작성자 황진아 등록일 2018-02-28 조회수 2964

소설 <시녀 이야기>의 작가 마거릿 애투드는 1980년대 초 수필에서, 남자들은 여자가 비웃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한 남자의 말을 인용한다. 애투드가 나중에 젊은 여자들에게 묻자 그들은 남자들이 죽일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무시당하기’와 ‘살해당하기’라는 이 비대칭적 공포의 이항관계는 남녀 간 불균형한 힘의 구도를 드러내면서 슬프게도 수많은 폭력사건들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이 되곤 한다.

여자들에게 무시당해 범행했다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자신을 무시한 것 같아 아르바이트 여성을 둔기로 가격했다는 지난주 인천 부평 편의점 폭행사건 같은 강력범죄에서부터 지난해 국회청문회에서 “여자분”에게서 질책을 처음 들은 터라 당황했다는 말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기술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미묘한 발언까지, 여성혐오는 널리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질책의 주체가 대통령이기보다 ‘여자’였음을 이 부회장이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자의 무시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은 여자를 남성성의 가치, 남성의 세계관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애투드가 인용한 그 남자는 여자가 남자의 세계관을 깎아내릴까봐 두려운 거라고 덧붙였다.

더 단순화하자면 여성혐오는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즉 남성이 인정욕구나 돌봄, 성욕 충족을 위해 언제나 여성에게 접근할 수 있고 여성이 언제나 남성의 필요와 요구에 순응한다는 기대이다. 여자들의 무시에 대한 분노는 여성의 몸, 노동, 감정에 대한 “접근권”이 여전한 남성의 권리라는 생각에 기인한다. 인정욕구를 포함한 남성의 필요를 여성이 충족시켜야 한다는 환상은 사실 남성성을 매우 취약한 것으로 만든다. 여성의 무시, 거부야말로 그 취약함을 폭로하기에 견디기 어려운 모욕인 것이다. 애투드가 인용한 여성들의 공포는 남성성의 이런 취약함이 살인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역설에 대한 직관이다.

클럽에서 대화를 거부한 여성을 남성이 총으로 쏜 사건이라든지, 고등학교 졸업무도회에 같이 가자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남학생이 여학생을 살해한 사건 등은 해외에서도 보도된다. 201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이슬라비스타에서 엘리엇 로저는 여성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데 분노해서 여러 명의 남녀를 무차별 살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헤어진 (또는 헤어지자는) 연인에 대한 폭력사건들이, 상호합의되지 않은 이 접근권에 대한 병적 집착, 그 상실에 대한 부적응과 상관이 있다. 여성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때마다 폭력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지난주의 종로 여관 화재사건은 이 접근권이 아직도 얼마나 당연시되는지, 그것이 일반화되어 어떤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피의자는 여관주인이 성매매 여성을 불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노해서 방화한 것으로 알려졌고, 무고한 세 모녀를 비롯한 여섯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사건은 성욕 충족의 도구로서 불특정한 여성에게 접근하지 못했다는 분노가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무작위적 폭력으로 돌변했다는 점에서, 무시, 거부에서 살해로 이어지는 젠더폭력의 비극적 보편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오랜 가부장제의 역사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거의 일방적으로 행사해 온 성적 접근권은 모든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에서 이제 존재할 수 없다. 특히 페미니즘은 그동안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미투”(#MeToo) 캠페인이나 최근 다시 주목받은 장자연 사건이 보여주듯 돈과 권력을 지닌 남성들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성적 접근권을 무법적으로 누리는 셈이다. 법과 제도의 차원에서 그나마 이루어진 변화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도 갈 길이 멀다. 페미니즘은 가장 기본적인 그 목적을 현실화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백래쉬>의 저자 수전 팔루디의 말처럼 반격은 “남성들이 경제적 위기에 부닥쳤다고 느낄 때 더욱 심해진다”. 실제로 안정된 경제기반 확보 가능성과 함께 연애, 결혼의 기회도 줄어들면서 남성들의 박탈감이 부각된다. 하지만 여성의 자기결정권 확보가 남성적 권리의 박탈은 아니다. 타자를 연루하는 욕망의 충족은 ‘권리’일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에는 (혐오를 향한 모든 비판에 그러하듯) 흔히 혐오가 더 쏟아진다. 그것이 혐오의 증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혐오를 넘어 살아남기, 함께 살기를 위한 비판과 성찰을 멈출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페미니즘의 소멸이다. 더 이상 페미니즘이 필요없는 세상 말이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기사입력 2018-01-25 20:5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84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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